2010년 8월 17일 화요일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



역사의 진실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그 실수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없다면 같은 역사는 반복됩니다.


위 사진은 일본 큐우슈 도요스 탄광의 한국인 합숙소 벽에 쓰여진 글귀이다



이들에게 패전 이전 일본 제국에 대한 기억은 '자랑스러운 영광'의 역사이지 반성해야할 역사가 아니다.

교과서가 계속 왜곡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일에서는 전범세력이 추적, 처벌되고 있지만, 전후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자행한 전범세력이 청산되지 않고 지배세력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 허동현 교수, 경희대 교양학부 -

[명칭문제-일본군에 의한 성노예]

국제활동을 통해 붙여진 ‘일본군에 의한 성 노예(sexual slavery)’가

가장 잘 본질을 설명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접할 때 흔히 ‘정신대’, ‘종군위안부’, ‘위안부’ 등의 명칭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 우리 정부조차 공식 외교용어로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이 용어 속에는 ‘일본군 성노예 역사’를 은폐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기에 앞서 잘못된 용어를 고쳐 우리의 역사의식부터 바르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성노예>란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한 여성피해자들을 말합니다

종군(從軍)이란 사전적 의미로 ‘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감’을 뜻합니다.

이는 다분히 자발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안부 용어사용은 피해당사자인 우리가 일본이 자행한 부녀자 성 유린 범죄를 ‘나라 위해 몸바쳤으며’ 황군을 ‘위안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억지 강변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관계법령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사용하고 있으며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쿠마라스와니 및 맥두걸보고서) 에는 일본군의 ‘조직적 강간, 성노예, 노예적 취급’ 즉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공식적으로 종군위안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위안부의 사전적 의미]

위안부라는 단어 자체는 1973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해에 출판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센다 가고(千田夏光) 지음)라는 소설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현재 일본은 위안부의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위안부’라는 단어에 대해 일본의 권위있는 사전 가운데 하나인 “고시엥”(廣辭苑)은‘일제때 군을 따라(종군하여) 전장에서 군인들을 위문해 준 여자’라고 뜻풀이하고 있습니다. ‘위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또한 ‘종군’이 자원한 것인지 강제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종군 위안부’ 혹은 ‘군 위안부’ 따위의 용어는 모두 자원해서 종군한 종군기자, 종군간호사와 같이 그들도 마치 ‘참전 군 병사들에 대한 위안을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처럼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정신대(挺身隊)]

■ 사전적의미

.‘정’(挺)은 1차적으로 ‘몸(이나 몸의 일부)을 내밀다’ 혹은 ‘곧게 펴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 뜻이 나중에는 ‘헌신하다’ ‘희생하다’ 따위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따라서 ‘정’(挺)이라는 한자의 어의가 시사하듯 ‘정신대’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기로 작정한 구국대’라는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행위의 자발성, 혹은 능동성만 강조되어 있을 뿐 강제성, 피동성의 개념을 떠올릴 여백은 전혀 없습니다.

■ 역사적 배경

정신대란 일제의 침략전쟁이 1940년대에 들어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자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일본 및 식민지, 점령지의 탄광, 군수공장, 철도, 비행장, 병원 등에서 ‘근로할’ 인력을 일본과 그밖의 점령지에서 남녀 구별 없이 차출, 징용한 조직을 통칭합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후 식민지 청장년 남자에게는 전장에의 출진을, 여성에게는 의료·보도·군수공장의 근로사역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강제동원에 응하도록 사회 분위기를 몰고갔습니다.

일제의 남녀 강제징발은 이미 태평양전쟁 이전부터 행해졌으나 전황이 점차 불리해지던 1942년 들어 한층 본격화되었습니다. 전쟁기간 동안 총 600여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되었습니다.

그 중 여성 동원의 경우 일제는 ‘여자근로정신대’라는 허울을 씌워 징발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군 위안부‘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한 술책이었으며 대부분 각 전선의 일본군 성노예로 압송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예외 없이 거의 모두 처음에는 근로정신대에 동원되어 갔지만 최종 근로처는 ‘군 위안소’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정신대를 일본군위안부와 혼용한 이유는 여성의 경우 정신대로 강제징용될 경우 대부분이 일본군 위안부로 이송되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으로 인생 짓밟힌 ‘성노예’ - 김학순 할머니]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군에 강제로 납치당해 ‘일본군 성노예’로 전락한 신세였습니다.

그녀는 1939년의 어느날 베이징(北京)에서 중국인 양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던 중 느닷없이 식당으로 들이닥친 한 무리의 일본 병사들에게 납치돼 동북의 하얼빈(哈爾濱) 북쪽 교외에 위치한 일본군 기지로 끌려갔습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간 그녀는 일본군의 협박과 강제에 배겨날 길이 없었고, 결국 하루에 적을 때는 10여명, 많을 때는 30명도 넘는 일본군의 더러운 배설물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열여섯을 갓 넘긴 소녀에 불과했습니다.

꽃다운 16세 소녀의 순결과 꿈은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듯 짓밟혔고, 그날로부터 그녀는 자신이 왜 납치되어야 했는지, 또 단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 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가항력적 타자의 폭력과 부조리에 의해 결정되어야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기구한 운명앞에 던져진 것입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죽지 못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일본군에 ‘종군’할 의사도, ‘위안’할 그 어떤 이유도, 의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군에 의해 인권이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그로 인해 파탄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던 ‘성노예’였습니다

[ 희 생 인 원 ]

성노예 희생자의 총인원은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쥬오대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의 계산법에 의하면 약 2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었으며, 중국인과 대만인도 희생되었습니다.

그밖에 필리핀, 타이,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일본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에게 희생되었습니다.

생존한 사람들은 하루에 30번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증언하였고, ‘일본군 위안부’피해국 중 유일한 서양국가인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는 1990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세계최초로 밝혔습니다.

[ 소 송 ]

한국인 등을 중심으로 위안부였던 사람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한일 기본 조약으로 해결 완료 등을 이유로 패소했습니다.

현재 일본 사법부에서는 전쟁 전 국가간의 배상이 법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인정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일본의 주장근거

개인에게는 법적 배상청구의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고있습니다.

1>일본정부는 해당 국제협약에 따라 법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왔다.

2차 대전 후 일본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맺은 평화조약과 국제협정에 의해 개인의 법적 배상청구권은 완전히 해결되었다.(한일협정 제2조 1항)

2>2차 대전시 군위안소문제에 관한 모든 민사 또는 형사사건은, 이제는 시효규정의 적용에 의한 시간적 장애로 더 이상 제기할 수 없다.

3>국제협약법은 개인과 국가 사이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규율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위안부는 일본에 대해 어떠한 청구권도 제기할 수 없다.

[ 증거 ]

1945년 4월 당시 중국 쿤밍에서 포로들을 조사했던 미 육군 조사보고서에는 일본 공장의 여직공을 뽑는다는 모집 공고를 보고 속아서 모집됐다는 당시 증언의 내용이 공개됐으며, 1937년 12월 21일 중국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소속 경찰관이 보낸 문서에 황군장병 위안부녀 도래에 관한 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이 공개됐다.

미국 의회조사국(CRS) 보고서에 미군이 미얀마에서 발견한 20여명의 한국인 출신 '위안부'의 증언과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가 미국 정부에 보고한 일본군의 한국인 위안부 강제동원 기록, 네덜란드 정부문서기록보관소에 보관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자료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일본군이 조선인 부녀자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위안부를 강제로 징집했음을 뒷받침해주는 판결문 기록이 발견되었다.

일본 요시미 교수가 1980년 위안부 관련 서류를 우연히 발견한 서류에는 중국 북부를 점령한 구 일본군의 참모가 위안소의 설치를 명령하는 내용 이 담겨져 있었다.

1956년에 중국에서 행해진 일본인 전범 재판으로 스즈키 히라쿠 중장의 자필진술서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여성을 유괴해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진술이 적혀있다.

교토시에서 열린 종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전쟁의 진실을 말하는 모임’에서 1942년 싱가포르에서 육군 헌병대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나가세 다카시(永瀨隆·89)씨는 “조선 위안부들은 모두 군용선에 실려 왔다”고 증언 당시 상부 명령으로 한반도에서 온 여성들에게 본어를 가르쳤으며 여성들은 “싱가포르의 일본군 식당에서 일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곳에 도착하자 (일본군이) 위안부를 할 것을 강요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고 증언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던 일본인(아오치 와시오, 1967년 야스쿠니에 합사)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소의 재판에서 "아오치는 1943년 6월 2일 군정감부로부터 매춘업소를 개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차 지시를 받은 후 이를 수용했다"라고 군이 위안소 설치를 지시했음을 인정했다.

일본 국립국회 도서관 보관되어 있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문서 중에 인도네시아 모어섬에서의 일본 육군중위에 대한 심문조서에서는 현지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강제로 추행 당한후 무차별 사살된 여인들...

옷을 벗긴 채 가랭이를 ??고 있는 잔인무도한 일본군 스팔넘들

강간 후 대검으로 찔러 죽인 참혹한 사진(옆구리에 찔린 자국이 보인다)

일본군 쳐죽일 놈들이 여인을 겁탈하는 장면

위안부 징집에 거부하며 살려 달라고 빌고있는 우리 조선처녀들

위안부에 강제로 끌려가는 조선처녀들

부대내 위안부 막사에서 쉬고있는 조선처녀들

조선처녀를 강제 유린하기 위해 줄을 서있는 일본군











인터넷에서 조금만 신경쓰면 이런 사진 얼마던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들이 심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사람들은 모두 친일 매국노들일 겁니다

저렇게 억울한 일을 겪으신 10만여명에 달하는 우리의 할머니들의 혼령이라도 편하게 가시길...

우리 후손들이 그 사실을 똑바로 알고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위안부로 강제 징집된 조선의 처녀들

좌측 임신한 여성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오른쪽 일본군 씨바늠은

뭐가 좋은지 웃고 있다. ....임신한 여성은 죽였다고 한다

일본군은 여성 한사람에게 콘돔(피임기구) 2개 이상 지급 하지 않았다

세척하여 계속 사용해야 하고 만약 임신 하게 되면 죽임을 당했다.

좌우에 있는 막사에서 일본군을 맞이 했다

일본군 고급간부는 어린소녀들을 위안부로 배정했다

강제로 추행 당한후 무차별 사살된 여인들...

전신 나체로 옷을 벗겨 놓고 치욕스런 사진을 찍고 있다

옷을 벗긴 채 가랭이를 ??고 있는 잔인무도한 일본군 스팔넘들

강간 후 대검으로 찔러 죽인 참혹한 사진(옆구리에 찔린 자국이 보인다)

일본군 쳐죽일 놈들이 여인을 겁탈하는 장면

변태일본군들이 여인에게 스스로 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장면이다 쳐죽일 놈들

여인의 하의를 벗겨놓고 희롱하고 있는 일본군 시파늠

생긴 것이 쥐를 닮았다

일본군의 총칼앞에 강제희롱 당하는 여인

일본군의 총칼앞에 강제희롱 당하는 여인

위안부 징집에 거부하며 살려 달라고 빌고있는 우리 조선처녀들

위안부에 강제로 끌려가는 조선처녀들

부대내 위안부 막사에서 쉬고있는 조선처녀들

치마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희롱하는 일본군 시파놈 (조선처녀는 치욕에 어쩔 줄 몰라 얼굴을 가리고 있다)

조선처녀를 강제 유린하기 위해 줄을 서있는 일본군 시파늠들

여인의 다리를 강제로 벌리게 하여 사진을 찍은 일본군 변태놈들

밖에서 창문으로 강제유린 당하는 광경을 구경하는 일본군 시파늠들

막사뿐 아니라 근무지로 불러내어 성욕을 채운 일분군



일본군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짐승들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

반항하거나 병이걸려 더이상 위안부로서의 가치가 없을때는 이렇게 죽이기도 했다

그냥 죽인게 아니라 음부에 총을 쏴 죽였다 ....오른쪽 엉덩이에 총알이 뚫고 나간 상흔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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